"대전이 수원 삼성과 견줄 수준 되면 좋죠"

2007. 9. 4. 17:16Sports Story/축구&수원

[오마이뉴스 이성필 기자]

▲ 수원 시절의 김호 감독. 수원팬들은 그를 감독님이 아닌 '아버님'이라 불렀다. 사진은 2003년 시즌 마지막 홈경기인 대구FC와의 경기종료 뒤 고별행사.
ⓒ2007 김우리씨 제공

2003년 11월 16일 수원 빅버드(수원 월드컵경기장의 애칭). 프로축구 수원 삼성 서포터 '그랑블루'의 운영진이던 김우리(24)씨는 주심의 호각이 울리자 연신 눈물을 쏟아냈다. 축구계의 '영원한 야인' 김호(63) 감독이 1996년부터 8년간 몸담았던 수원에서 치르는 마지막 경기였기 때문이다.

하염없이 우는 김씨와 팬들에게 김호 감독은 "여러분이 보내주신 그 사랑의 향기를 가슴 깊이 새기며 떠납니다. 어디에서든 여러분을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큰절로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로부터 햇수로 4년이 흐른 지난 7월,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수원의 '영원한 아버지'로 남을 줄 알았던 김호 감독이 수원과 앙숙인 대전 시티즌 감독에 전격 선임된 것이다. 부임하자마자 김호 감독은 공격적인 전형을 내세워 3승 3패(8월 29일 기준)를 기록하며 '무승부 제조팀' 대전을 환골탈태시키고 있다.

이런 김호 감독을 지난 27일 오후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국곡리에 위치한 대전 시티즌 숙소에서 만났다. 구단 스폰서인 계룡건설의 직업 훈련원을 활용해 선수들과 같이 숙소 생활을 하고 있는 그의 방에는 전력 분석지를 비롯해 팀 운영 방안을 적어놓은 메모지가 가득했다.

김호와 대전 시티즌의 미래

김호 감독은 애초 대전 감독직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평소 친분이 있던 AI 스포츠 곽희대 대표가 대전 감독 공모에 자신의 이력서를 내면서 일이 커졌다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 대전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고 결국 그는 감독직을 수락했다. 그러나 대전이 처한 어려운 상황은 경험이 풍부한 그에게도 머리가 아플 정도다.

"막막했죠. 이것저것 둘러보고 알아봤는데 수원과 비교해 너무 열악하더군요. 그래도 어렵지만 보람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열심히 해서 대전의 축구가 재건되는데 도움이 된다면 한 번 해보자는 결심이 섰고…또 대전은 최초의 시민구단 아닙니까? 발전해 나갈 미래가 있던거죠."

김호 감독은 하나하나 계획을 세워 나가고 있다고 했다. 그는 수원 감독 재임 시절 바라본 대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때는 대전이 수원보다 우위에 있을 정도로 좋은 전력을 보유했습니다. 단 우승하려는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아요. 팀 내 리더가 없었기 때문이죠. 당연히 좋은 경기를 하고도 결과는 똑같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 감독은 시민구단에 대해 한마디 했다. 기업구단이 좋은 자본을 바탕으로 우승에 초점을 맞춘다면 시민구단은 선수 육성과 함께 지역 축구환경의 재건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

▲ 김호의 대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2007 대전 시티즌 제공

김 감독은 시민구단이 잘 되기 위해서는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민구단이 잘 되려면 제도를 잘 만들어야 해요. 세제를 감면하고 선수 육성을 위해 국가에서 법인을 만들어줘야 하는 거죠. 스포츠가 단순히 승패만을 즐기는 것은 아니잖아요. 사회에 환원하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얼마나 방황을 많이 합니까. 스포츠가 다양한 감동을 안겨주면서 건전한 역할을 하는 거예요. 이게 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득인데 왜 그렇게 국가와 관계기관에서는 신경을 안 쓰는지…."

축구를 떠나 스포츠의 긍정적 효과를 설명한 그는 대전 구단과 팬, 시 당국이 구단을 시의 자부심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전'이라는 브랜드와 팬들의 열정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이를 위해 김호 감독은 지리멸렬하지 않을 것이라 강조하며 대가를 치르더라도 변화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 팀은 6강을 위해 최후까지 싸울 수 있는 팀이어야 합니다. 프로선수들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고요."

'영원한 야인' 김호 감독은 대전에 대해 확신을 하고 있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각오를 하고 온 만큼 대전이 미래가 있는 구단이 됐으면 좋겠다는 김호 감독은 자신이 물러난 뒤 다른 후배가 와도 잘 할 수 있는 팀을 만들겠다는 의욕을 보였다.

김호와 수원 삼성 그리고 그랑블루

▲ 김호 감독은 수원 창단 첫해 후기리그 우승이라는 업적을 남겼다. 그해 울산 현대와의 챔피언결정 2차전을 잊을 수 없는 경기로 꼽았다.
ⓒ2007 수원 삼성

대전의 감독이 된 이상 그를 여전히 '아버님'이라고 부르며 신뢰하는 수원 팬들과 그들이 응원하는 수원과는 관계를 다시 설정해야 한다.

2003년 정규리그 종료 뒤 김호 감독이 물러나고 수원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한국대표팀 감독을 역임한 차범근 감독을 선임했다. 차 감독은 첫 해 정규리그 우승을 이끌어내며 수원의 가슴에 세 번째 별을 달아줬다. 이제는 차 감독도 경쟁 상대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서로 견줄 수 있는 수준이 되면 좋겠죠? 경쟁하며 눈여겨보는 겁니다."

경쟁 상대로 규정했지만 그의 수원 사랑은 여전하다. 그는 "수원 팬들은 내가 대전 간 것을 슬퍼하겠지만 축구에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간 것입니다. 많이 이해를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우승 기록 모두는 수원의 명예입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서포터 그랑블루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창단과 함께 조직된 그랑블루는 어느새 K-리그 최고의 서포터로 성장해 한국 축구의 응원 문화를 새로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포터들과 자주 만나 대화도 하고 밥도 먹고 하면서 어떻게 하면 서로 발전할 수 있을지 고민했죠. 지금 4만 명 정도 되는 그랑블루는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에요."

그에게 수원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를 꼽아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1996년 울산 현대와의 챔피언결정 2차전과 2003년 자신의 고별 경기를 꼽았다.

"마지막 경기의 기억이 여전히 남아있지요. 죽는 그날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웃음) 수원은 영원히 내 마음 속에 간직될 것입니다. 그랑블루를 보면 가슴 뭉클해요. 그랑블루가 있기에 김호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수원에 기여한 게 얼마나 많아요. 떠나있어도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흰머리가 덮인 김호 감독의 음성은 약간 떨렸다. 그는 수원에 대한 추억을 되짚으며 대전 팬들에게도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대전 팬들도 '그랑블루' 이상의 열정을 보여주길 바랍니다. 축구 붐이 일어나면 모두가 즐겁습니다. 내가 물러나고 다른 후배가 와서 감독을 해도 열기가 넘칠 정도로 말이죠!"

한국축구 그리고 미래

▲ 그의 손짓에 선수들은 긴장한다.
ⓒ2007 대전 시티즌 제공

익명을 요구한 한 축구인은 "몰상식한 제도를 몸소 경험해 온 때문인지 김호 감독이 요즘 제도 개선 등 축구계 전반의 문제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축구인의 말처럼 김호 감독은 2004년 12월 한국축구지도자협의회를 결성해 축구계 개혁에 뛰어들었다. 협의회는 고인이 된 차경복 전 성남 일화 감독, 박종환 전 대구FC 감독 등 300여 명의 축구지도자가 모여 축구협회의 잘못된 행정을 바로잡고 후진적인 축구환경과 제도를 개선하는데 중점을 뒀다.

김 감독은 "18세 이상이 돼야 프로에서 뛸 수 있는 현행 구조에서 재능 있는 선수의 조기발굴은 어렵다"고 주장했다.

"학교에서 공부 다 하고 경기까지 뛰어서는 경쟁력이 없어요. 팀에서 육성을 안 하는 상황에서 선수 한두 번 보고 드래프트로 지명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

드래프트 말고 다른 문제점은 없을까? 이에 대해 그는 경험이 풍부하고 나이가 많은 지도자가 17세 연령의 팀에 고루 퍼져야 한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15년 이상의 지도자 경력을 가진 이들이 17~19세 팀에 있어야 합니다. 노장 지도자들이 가서 자식 키우듯 지도해야 좋은 선수들이 많이 나와요. 기술은 하루아침에 느는 것이 아니에요. 이번에 17세 월드컵을 보세요. 우리 아이들은 폼 잡으며 축구를 하고 유럽 아이들은 사력을 다하더군요. 경기 투쟁력이나 운영능력이 전혀 없어요."

지난 18일부터 국내에서 열리고 있는 U-17 청소년 월드컵에 참가한 각국 대표팀 지도자들은 유소년 축구 육성 경험이 많다. 우승후보로 꼽히는 잉글랜드의 존 피콕 감독의 경우 1998년 잉글랜드 챔피언십의 더비 카운티 유소년팀 감독을 시작으로 U-16 대표팀 감독을 거쳐 U-17 대표팀 감독을 맡아오고 있는 유소년 축구의 전문가다.

▲ 김호 감독은 선수들과 함께 숙소에서 생활하고 있다. 예상 밖으로 방에는 욕실이 없었다. 선수들과 공동 세면장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2007 이성필

한국 축구가 튼튼하기 위해서는 뿌리부터 완벽하게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 김 감독의 생각이다. 그의 '뿌리론'은 정책을 집행하는 축구협회와 프로축구연맹의 전문화에 대한 요구로 이어진다.

"K-리그 경기 일정을 예로 들어 볼까요? 지금 3~4일 간격으로 계속 경기를 하고 있는데 이러다간 결국 선수도 망가지고 현장 지도자도 발전이 없어요. 협회나 연맹이 자기 일들만 하지 말고 멀리 좀 봤으면 좋겠어요."

목소리 높여가며 협회와 연맹이 체계적이고 계획성 있는 집단으로 변해야 한다고 역설하던 그는 최근 국가대표 감독직을 사퇴한 핌 베어벡 감독에 대해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베어벡 감독이 그만두겠다고 한 것은 한국축구가 희망이 없다는 소리에요. 상황을 보고 안 되니 내버리고 간 거죠. 과도기라 해도 박성화 감독 역시 이런 체제에서는 피곤해 질 겁니다."

북한축구와 김호 감독의 꿈

김호 감독의 고향은 경상남도 통영이다. 그런 그에게 시쳇말로 '생뚱맞은' 질문을 하나 던졌다. 체력이 다하는 순간까지 북한에서 한 번 경기를 치러보거나 동시대 활동했던 북한 선수들과 같이 뛰어보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고 말이다.

오는 10월 초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다. 자연스럽게 체육 분야에 대한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과거 북한과의 경쟁의 중심에 있었던 그에게는 더욱 의미가 깊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 대표팀이 돌풍을 일으키며 8강에 오르자 이에 자극받은 한국정부는 1967년 2월 중앙정보부 지휘 하에 축구 특수부대인 '양지(陽地)'를 창단했다. 김호를 비롯해 김정남(울산 현대 감독), 이회택(축구협회 부회장) 등이 양지에 소속됐다. 이 팀의 목표는 당연히 '북한에 승리하는 것'이었다. 비록 북한과는 한 차례도 겨루지 못했지만 '숙적' 일본과는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 대전 부임 뒤 브라질 인터나치오날과 첫 경기를 한 김호 감독이 벤치에 앉아 선수들을 보고 있다.
ⓒ2007 대전 시티즌

그는 이때의 일을 웃음으로 넘기며 북한을 축구로 열어야 한다고 말했다. 동, 서독으로 나뉘어 있을 당시 방문했을 때와 통일이 된 상태인 지난해 독일 월드컵 때 방문했을 때를 비교해 보니 변한 게 하나도 없더란다. 서로 오랜 시간 교류를 했는데도 가까워지기 어려운데 우리는 오죽하겠느냐는 것.

그렇다면, 김호 감독의 구상은 어떤 것일까?

"K-리그 팀이 18개 정도가 되면 북한에서 4팀 정도가 만들어져 참가하는 것도 괜찮죠. 그게 어렵다면 동아시아 대회를 여는 겁니다. 북한에서 네 팀 정도가 나오고 중국, 일본도 네 팀씩 총 16개 팀이 주중에 경기를 하는 거죠. 1일권으로 이어지는 만큼 비행기 타고 왔다 갔다 하면 가능하지 않겠어요? 북한도 홈, 원정을 치르다 보면 뭔가 달라질 겁니다."

이외에도 궁금한 것이 많았으나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두 시간 반을 할애한 것도 이제 팀을 맡아 할 일이 수북이 쌓인 노(老)감독에게는 적지 않은 시간이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정리를 부탁했다.

"대전은 가난합니다. 올 겨울에는 돈 아껴서 전지훈련을 가지 않고 국내에서 훈련하려 합니다. 국내 선수 중에는 맘에 드는 아이들을 데려와 키워보고 싶습니다. 우리 팀에는 인기 있는 선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 아이들이 운동장에 나오면 팬이 열광해야 하고요. 그런 선수를 키워 볼 겁니다. 비단 우리 구단뿐만 아니라 다른 구단도 그렇게 하려면 지자체를 비롯해 중앙정부도 신경을 써줘야 하고 제도도 개선해야 합니다. 포르투갈이 유럽무대에 다시 나와 선전할 수 있었던 것도 제도가 뒷받침됐고 그에 따라 청소년들이 육성됐기 때문이죠. 어쨌든 열심히 해보려 하니 팬들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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