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소 '이싸빅', 태극마크는 못 달지만

2007. 7. 27. 16:00Sports Story/축구&수원

1983년 프로축구 출범과 함께 포항제철이 미드필더 세르지오 루이스 코고와 호세 로베르트 알베스를 브라질로부터 임대해 온 이후 한국 스포츠의 외국인 선수 역사도 어느덧 25년째가 되었습니다. 프로축구를 시작으로 90년대 중반 프로농구, 프로야구가 차례로 외국인 선수 제도를 도입했고, 출범 3년째를 맞는 프로배구도 외국인 선수들이 코트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땅을 밟았던 수많은 외국인 선수들 중에는 불미스러운 일을 벌이는 선수도 있었지만, 뛰어난 실력과 성실한 자세를 두루 갖춰 국내의 어떤 스타 선수 못지 않게 많은 사랑을 받는 외국인 선수도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한국 스포츠 외국인 선수 시대 25년'을 맞아 한국인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외국인 선수를 재조명 하는 기획을 6-7회에 걸쳐 게재할 예정입니다.<오마이뉴스 편집자 주>
[오마이뉴스 엄두영 기자] "외국인 선수라는 느낌이 전혀 없었습니다." (김원곤·포항 스틸러스 서포터 마린스 회장 )
"정말 매너가 좋은 선수였어요. 갑자기 팀을 옮겼을 때 너무 아쉬웠죠." (박성남·성남 일화 서포터 천마불사 회장)
"서포터들이 뽑은 '최고의 인기 선수'입니다." (박장혁·수원 삼성 서포터 그랑블루 회장)


모든 프로선수들은 팬들의 사랑으로 산다. 여기 그 팬들의 사랑에 감명받아 태어난 조국의 국적을 버린 선수가 있다. 사랑하는 팬들의 나라를 자신의 조국으로 삼아, 이제는 외국인이 아닌 한국인이 된 선수.

한국 생활만 10년째. 여느 한국인 못지않게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수원 삼성의 이싸빅(34)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크로아티아 최고의 유망주, 한국을 택하다

▲ 지난 3월 17일 부산과의 경기중인 이싸빅.
ⓒ2007 수원삼성축구단
그의 귀화 전 이름은 '야센코 사비토비치'. 그는 지난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예선에서 명 수비수 다리오 시미치(AC 밀란)와 함께 조국 크로아티아의 수비진을 책임졌던 검증된 유망주였다. 그는 시미치와 함께 안드리 ??첸코(첼시)가 공격을 진두지휘한 우크라이나의 공격을 잘 막아내며 승리에 일조했다.

그러나 같은 조에 속한 델베키오(아스콜리)가 버틴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1무 1패로 무릎을 꿇으며 최종 올림픽 진출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그는 크로아티아 명문 팀 '자그레브 자그레브' 에서 뛰면서 UEFA컵에도 출전해, 유럽 빅 클럽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는 지난 1998년 유럽인에게 단지 '차범근'과 '홍명보'의 나라로 기억되는 변방의 한국을 행선지로 택한다. 지금이야 크로아티아 출신 선수들이 K-리그를 많이 거쳐가 생소하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K-리그에서 크로아티아 선수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이싸빅은 어린 나이에 변방에 있는 미지의 세계로 뛰어든 것이다.

이싸빅의 첫 팀은 포항. 그를 영입할 당시 포항은 홍명보 선수가 J리그 벨마레 히라스카로 이적하며 수비에 공백이 생긴 상태였다. 그는 입단하자마자 홍명보의 공백을 완벽하게 메우며 포항 수비의 핵으로 자리매김 했다. 그리고 포항은 그와의 계약이후 98년 4월 아시안클럽챔피언십 2연패를 달성하며 '싸빅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그는 큰 키를 이용한 제공권 장악에 강점을 보였고, 특유의 터프한 플레이로 상대 공격의 맥을 끊으며 수비를 진두지휘했다. 게다가 K-리그에서 10년 동안 단 한 차례의 퇴장도 당하지 않았을 만큼 깔끔하고 매너 있는 수비를 보여줬다.

"당시 그보다 뛰어난 수비수는 없었다"며 이싸빅의 트레이드를 아쉬워했던 김원곤(29) 마린스 전 회장은 "포항에서 그가 은퇴할 때까지 뛰어주길 희망했다"며 그가 팀을 옮기는 순간 많은 팬들이 아쉬워했던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이싸빅은 2002년 제주에서 벌어진 수원과의 FA컵을 끝으로 포항의 유니폼을 벗었다.당시 이싸빅은 포항 서포터들 앞에서 팬들에게 공손히 두 손 모아 미안함을 표현하고 울면서 자신의 유니폼을 벗어서 넘겨주었고 포항의 팬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떠나는 이싸빅을 보며 포항의 팬들도 마지막 순간을 눈물로 함께했다.

그는 다른 팀으로 옮겼지만, 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경기장에서 포항 서포터들과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포항 서포터들도 이싸빅을 그들의 선수처럼 환영해주고 있다.

된장찌개 먹는 외국인 선수, 한국인이 되다

▲ 작년 8월 서울과의 경기, 이싸빅 선수가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서포터들을 향해 기쁨을 전하는 장면이 이채롭다.
ⓒ2007 수원삼성축구단
그는 실력이 뛰어난 단순한 외국인 선수가 아니었다. "경상도 사투리로 대화하며 팬들에게 많은 즐거움을 주었다"고 성남 팬 미팅 당시를 회상하는 박성남(34) 천마불사 전 회장의 말처럼 포항에서의 5년은 그를 완벽한 '경상도 사나이'로 변화시켰다.

가장 존경하는 축구선수를 물으면 그는 주저 없이 '레전드 홍명보'를 외쳤고,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를 꼽았다. 이싸빅 선수는 어쩌면 포항 시절부터 귀화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싸빅은 지난 2003년 성남으로 이적해 그 다음해 한국인으로 귀화한다. 당시 대한축구협회의 한 간부는 "실력은 국내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쿠엘류 감독(당시 국가대표 감독)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대표팀에 들어갈 수 있는 실력은 충분하다"고 전하며 그의 귀화에 큰 기대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당시 일본 스포츠 신문인 <닛칸 스포츠>도 "한국이 크로아티아 출신의 수비수 야센코 사비토비치의 한국 국적 취득을 진행시키고 있다"며 "그가 귀화하면 월드컵 3연속 출장을 목표로 하는 일본을 한층 더 위협하게 된다"고 보도한 바 있을 정도로 수비에서의 그의 존재는 국제적으로도 위협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싸빅은 지난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예선에서 대표로 활약한 것이 밝혀지며 아쉽게 태극마크를 달지 못하게 된다. 국제축구협회(FIFA) 규정상 귀화한 선수가 전 국가에서 청소년 대표나 올림픽 대표·국가 대표로 1경기라도 뛴 경력이 있으면 귀화한 나라의 국가대표로 뛸 수 없다.

당시 싸빅은 그 규정을 잘 몰랐고, 대한축구협회는 싸빅의 올림픽 대표 경력을 모르고 있었다. 안타깝게 대표팀에 선발되지는 못했지만, K리그에서 그는 계속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골 넣고 팬들 향해 달려가는 진정한 프로선수

▲ 작년 8월 1일 대전과의 FA컵 16강전에서 동점골을 터트린 후 반대편의 서포터석으로 세레모니를 하기 위해 달려가는 이싸빅, 이 사건으로 그는 수원 팬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2007 수원삼성축구단
그에게 있어서 축구는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이다. "축구 선수 이외에는 다른 길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그는 투혼에 있어서도 K-리그 최고 선수이다.

작년 전남과의 FA컵 챔피언 결정전에서 전반 17분 전남의 강슛에 안면을 강타당해 쓰러지고 만다. 코피를 흘리며 경기를 뛰면서도 패배가 확정된 후 "얼굴보다 가슴이 더 아프다"고 자신의 아픔보다 팀의 패배를 더 아쉬워했다. 그리고 "우리 팬들이 진정한 챔피언이다"고 주저 없이 말하며 팬들의 사랑에 감사함을 표한다.

작년 8월 1일 대전과의 FA컵 16강전에서는 0-1로 지고 있던 후반 39분, 송종국의 코너킥을 타점 높은 헤딩을 멋지게 성공시킨 후 그는 수원 서포터가 있는 반대방향까지 뛰어가 90도로 몸을 숙여 인사했고, 팬들은 열광했다.

지난 3월 21일 서울과의 경기에서도 육탄 수비를 펼치다가 박주영 선수와 엉키며 얼굴을 발에 밟혀 의식을 잃고 안면에 금이 가는 큰 부상을 당한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팀의 대패(1-4로 패배)와 팬들을 걱정하는 파란 눈의 한국인을 미워할 팬들이 어디 있으랴.

성남에서 이적했을 때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팬과 팀을 향한 헌신적인 그의 태도에 팬들은 이적한지 얼마 되지 않는 그를 단기간에 '서포터들이 뽑은 최고의 인기 선수' 명단에 올려주었다.

이런 그에 대해 박장혁(29) 그랑블루 회장은 "진정한 프로 선수"라고 치켜세운다. 이싸빅은 프로축구선수로서의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실력은 물론이거니와 팀과 팬들을 사랑하는 마음도 가히 K-리그 최고 수준이다.

지난 3월 FC 서울 전에서 안면부상을 당한 후 수술을 받은 그는 현재 부상에서 회복하여 '축구 월드 시리즈' 출전을 위해 미국 원정길에 올랐다.

정효웅 MBC ESPN 해설위원은 "안면부상의 여파로 컨디션 조절이 힘들 수 있겠지만, 특유의 강인함으로 극복해낼 수 있을 것"이라며, "이싸빅 선수가 현재까지 K-리그에서 259경기에 출장 중인데 300경기까지는 뛰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기대감도 함께 나타냈다.

한국, 그리고 한국인이 너무나 좋아서 쉽지 않은 귀화까지 선택한 이제는 '추억이 된 외국인 선수' 이싸빅. 그는 K-리그에서 한국인이 가장 사랑했던 '외국인 선수'에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한 '한국인'으로 남기위해 오늘도 아낌없이 그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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