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167

2007. 11. 1. 17:46Love Story/사랑 그 흔한 말


파란 시간을 아세요?

불을 켜기엔 아직 환하고

책을 읽거나 바느질을 하기엔 조금 어두운 시간.

읽던 책을 그대로 펼쳐놓은 채 생각에 잠기고, 꿈을 꾸는 시간.

펼친 책장이 희미한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시간.

땅거미 질 무렵의 어슴푸레한 시간.

그림자는 빛나고, 땅은 어둡고, 하늘은 아직 밝은 시간.

온 세상이 파랗게 물드는 시간.

세상 모든 것들이 조용히 밤을 기다리는 시간.

하늘 끝자락이 붉어지고, 태양은 멀리 어딘가로 자러 가는 시간.

늘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다가 돌아갈 때만 조금 달라지는,

슬프고 아름다운 시간.

그런 파란 시간을 정말 아세요?


안 에르보 / 파란 시간을 아세요? 中




계절은 참으로 성실하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상관없이,

계절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다가온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또 봄이 지나가면 여름이 찾아온다.

여름 다음에는 가을이다.

가지가 죽은 가을.

그렇게 계절이 되풀이되고 가지의 존재는 조금씩 멀어져간다.


별똥별 머신 / 하시모토 츠무구




나는 여기에 앉아 황혼을 기다리면서 연초록 봄이 금빛 여름에게 밀려나고,

구릿빛 가을이 새하얀 겨울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을 지켜보았지.

'왜?' 라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수도 없이 되풀이 하면서.

그런 외로움을 견디면서,

생로병사의 끝없는 순환을 홀로 지켜보며 사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진작 알았더라면, 나는 과연 어떻게 했을까?

나는 지금가지 긴 세월을 텅 빈 가슴으로 살아왔고,

그 공허함은 이제 내 마음보다 더 커져버렸어.


라비린토스 / 케이트 모스




오후 4시, 내게는 없어도 좋은 시간,

모든 것이 나와 관계없어 보이고,

아무도 그리고 아무것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데

내가 그 무엇에 매달리려고 애쓰는 듯한 느낌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가는 시간,

모두들 제 나름으로 잘해 나가고 있는데

내가 오직 헛된 노력으로써, 나도 거기에 있어야 한다,

나도 그것을 해야 한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것만 같은 느낌 때문에

숨 쉬는 것도 그쳐 버리고 싶은 시간이었다.


무진기행 / 김승옥




햇빛이 앞 유리창으로 비쳐 들어와 나를 감싸고 있었다.

눈을 감는 순간 그 빛이 나의 눈꺼풀을 따뜻하게 내리 쬐는 것이 느껴졌다.

햇빛이 그 멀고 먼 길을 더듬어 이 작은 혹성에 도착해서

그 힘의 한 자락을 통해 내 눈꺼풀을 따뜻하게 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야릇한 감동이 나를 감쌌다.

우주의 섭리는 나의 눈꺼풀 하나 조차도 하찮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한 없이 슬프고 외로운 영혼에게 / 무라카미 하루키




나뭇가지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을 보고 있노라니 왠지 한없이 서글퍼진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햇살에 발길을 멈춘 나는

실눈을 뜨고 가지 끝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에 눈이 익숙해진다.

장지문 같이 반투명으로 비치는

초록색 잎사귀의 선명하게 드러나는 잎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순간, 나 자신이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절감한다.

그래, 저 잎사귀처럼 나한테도 뼈가 있지.

강한 빛을 비추면 누구라도 저런 식으로 뼈와 내장과 피부가 보일 것이다.

이 세상 아름다운 것은 모두 물리나 화학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내 뼈가 어두운 캐비닛에 던져지고

차가운 울림과 함께 서랍이 닫히는 것 같아 허무해진다.


굽이치는 강가에서 / 온다리쿠




눈에 물기가 많으면..

같은 바람도 더 차가운 법이다.

후회가 많으면..

추억도 아픈 법이다.


전남진 / 뒤돌아보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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